성 정하상 바오로(Paulus)는 남인 양반의 후예로 경기도 양근 지방 마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정씨 가문에서 최초로 신앙을 받아들인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로 1801년 신유박해 때 맏아들인 복자 정철상 카롤루스와 함께 순교하였고, 어머니인 성녀 유 체칠리아는 기해박해의 여파로 1839년 11월 순교하였다. 아버지가 순교할 당시 겨우 일곱 살이었던 정 바오로와 누이동생 성녀 정정혜 엘리사벳(Elisabeth)은 어리다는 이유로 어머니와 함께 풀려났다.
그러나 가산이 모두 몰수당해 살길이 막연해지자 양근 지방 마재에 있던 그의 숙부 정약용 요한에게 의지하고 살았다. 그런데 숙부가 전라도 강진으로 귀양 가 있던 때였기에 천주교를 믿지 않던 친척들로부터 갖은 천대와 냉대를 받았지만, 정 바오로는 어려서부터 어머니로부터 기도와 교리를 충실히 배웠다. 하지만 외교인들 틈바구니 속에서 신자의 본분을 지키기가 어려워 20세 때에 서울로 올라와 성녀 조증이 바르바라(Barbara)의 집에 머물면서 목자 없는 조선교회의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교회 재건을 모색하였다.
그는 함경도에 귀양 가 있던 한학자 조동섬 유스티누스에게 학문을 배우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양반 신분을 감추고 어떤 역관의 집에 하인으로 들어가 살다가 북경에 가서 세례와 견진과 성체 성사를 받고 주교에게 성직자 파견을 요청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고 계속해서 북경까지 9회, 변문까지는 11회나 왕래하였다.
그는 성 유진길 아우구스티누스와 조신철 카롤루스(Calolus) 그리고 강진에 유배 가 있는 삼촌 정약용의 자문과 후원으로 끊임없이 성직자 영입 운동을 전개했다. 그들은 로마 교황에게 탄원서를 보내는 한편, 북경 주교에게도 서신 등을 보냄으로써 마침내 조선교회가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임됨과 동시에 조선 독립교구가 설정되었다. 마침내 그는 유방제(劉方濟) 파치피코 신부를 모셔 들이고, 모방·샤스탕 신부와 앵베르 범 주교까지 모셔 들여 자신의 집에 모셨다.
정 바오로가 사제가 되기에 적당하다고 여긴 앵베르 주교가 그에게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치던 중 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주교를 피신시키고 순교의 때를 기다렸다. 이때 그는 체포될 경우를 대비하여 “상재상서”를 작성했는데, 이것은 조선교회 최초의 호교론이다. 그는 이 속에 박해의 부당성을 뛰어난 문장으로 논박했기 때문에 조정에서까지 이 글에 대하여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1839년 7월 11일, 포졸들이 정 바오로의 집에 달려들어 그와 노모 그리고 누이동생을 잡아 포도청에 압송하여 바오로와 4대 조상까지의 이름을 명부에 올리고 옥에 가두었다. 이튿날 상재상서를 포장대리에게 주니 사흘 후 문초를 시작하였다. 정 바오로는 무서운 고통을 강인하게 참아나갔고 배교하라고 엄명하였으나 거절하자 옥에 가두었다. 며칠 뒤 다시 끌려나와 톱질형을 받아 살이 떨어져 나가고 골수와 피가 쏟아져 나왔다. 또한 그는 샤스탕과 모방 신부의 은신처를 대라는 심문에도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 후 두 신부가 자수한 다음 또 심문을 받고 세 차례의 고문을 받았다. 그리하여 1839년 9월 22일, 서양 신을 나라에 끌어들인 모반죄와 부도의 죄명을 쓰고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